
아이돌 최시원이 삭제한 추모 게시글
“아니, 찰리 커크*가 누군데 저렇게들 난리야?
“저도 잘 모르겠는데, 뭐 적절하지 않은 인사인건 맞는 가 봐요.
옛날 아이돌 중에서 그거 올렸다고 팀 탈퇴하라는 소리까지 듣던데요.”
“애도가 비난을 받을 정도라면 대체 무슨 짓을 한 사람인지 궁금해지는데, 어쩐지 찾아보기가 싫어지네.”
“그러게요. 대체 무슨 짓을 한 사람일까요.”
애도의 자유조차 ‘정치적 신원’이 결정하는 시대
“REST IN PEACE CHARLIE KIRK.” 누군가는 평범한 애도의 표현으로 썼고, 누군가는 그 글을 본 후 격렬히 분노했다. 게시글을 올린 아이돌 그룹 슈퍼주니어의 최시원, 원더걸스 출신의 선예가 SNS에 찰리 커크를 추모하는 글을 올렸다가 비난 댓글에 시달렸고, 결국 삭제했다. 일부 팬은 탈퇴 운동까지 벌였다.
누군가를 애도하는 것조차 검열되어야 할까. 이제는 ‘애도’하는 행위가 개인의 감정이 아닌 ‘정치적 입장’으로 해석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애도’라는 것도 이제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본 감정이 아니라, 정치적 정당성의 시험대를 거쳐야만 허락되는 행위가 되었다.
감정의 표현조차 '정치적 연대'로 간주되는 구조
누군가에게 ‘애도’를 표현하는 순간, 우리는 ‘동조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찰리 커크의 사상을 옹호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는 이유만으로 ‘극우 지지자’로 낙인찍히는 일은 ‘애도’라는 감정 자체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드러낸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단지 SNS의 분위기 탓 만일까? SNS의 분위기는 저절로 조성된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누구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고, 누구는 안 되는지를 결정하는 권력 작동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감정은 본래 정치적이지 않다. 하지만 사회가 감정을 해석하고 구분 짓는 순간 감정은 정치화된다. 특히 애도는 죽음이라는 본질적 인간 경험에 대한 반응이기에 그 정치화는 더 깊은 분열을 불러온다. 정치적 이유로 애도조차 금지되는 순간 감정의 자유는 사라지고 만다.
국제적 합의와 개인적 불쾌감은 구분되어야 한다
“커크는 소수자 혐오 발언을 일삼았고, 그를 애도하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모욕”이라고 반박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히틀러에 대한 공적 애도 금지와 동일 선상에 놓는다. 하지만 이는 너무 지나친 비약이다. 히틀러와 나치 지도부는 국제법상 인류에 대한 범죄자로 규정되었고, 그에 대한 공적 찬양은 국제적으로 금기다. 반면 찰리 커크는 아무리 논란이 많은 인물이라 해도 국제법적·역사적 합의에 따라 ‘인류의 적’으로 규정된 바 없다. 그의 발언이 누군가에게 불쾌하거나 상징적 모욕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표현을 금지할 근거는 되지 않는다.
오늘은 커크, 내일은 또 누구?
불편함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감내해야 할 몫이다. 애도를 불편하게 여기는 것과, 그것을 금기시하거나 삭제하도록 압박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한 인물의 죽음에 대한 판단이 정치적 기준에 따라 선별되기 시작하면, 우리는 “누구는 애도받을 수 있고, 누구는 애도받을 수 없다”는 구도를 영속화하게 된다.
오늘은 커크, 내일은 또 다른 인물이 ‘애도 불가능한 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감정 표현의 자유, 특히 ‘애도할 권리’를 방어해야 한다. 그것은 찰리 커크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인간성을 권력의 통제에서 지켜내는 일이다.
*찰리 커크
미국의 평론가이자 사회운동가(1009~2025). 우파 성향의 정치단체 '터닝 포인트 USA(Turning Point USA)'를 설립해 이끌면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적극 지지하는 MAGA 공화당 진영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트럼프 대통령 열성 지지층의 대표적인 청년 기수 중 한 명으로 손꼽혔다. 사망 직전 375만여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정치 유튜버이기도 했다.